9월이 시작된 첫 날은 해사한 날씨 속에서 약간은 더운 듯한 따뜻함을 품고 있는 날이었다.

3베드-3배쓰의 큰 방을 어떻게든 본래의 용도를 찾아주려고 고민한 끝에 오피스 룸을 굳이 설치해보았다. 여기서 작업을 한다면 작업을 하겠고, 책을 읽는다면 책을 읽을 것이고.. 포항에서는 못해봤던 집꾸를 여기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마존 프라임은 여기서는 구원 투수 그 자체이다. 물론 가장 싼 물건들로만 구성했지만, 비쌀 이유가 있어야 할 곳은 아니니 오히려 좋았다.

침실 옆의 작은 책장도 나름 꾸며보았다. 궁금할 사람은 없겠지만 테이블 위의 향수는 크리드의 어벤투스, 라티잔의 베티베 에칼레트, 입생로랑의 턱시도 이다. 어벤투스는 내가 싫어하는 향수였는데, 면세점을 통해 좀 많이 싸게 살 수 있어서 사봤다. 전형적인 스킨 베이스 향수이다. 딥디크의 롬브르 단 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약간은 더 상쾌한 라티잔의 베티베 에칼레트를 추천한다. 약간의 바이올렛 향(가죽 향)을 가지고 있는 겨울 향수를 원한다면 입생로랑의 턱시도를 추천한다.



아무튼 아침 9시 정도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어 아침부터 맥코트니 홀에 방문하여 맷 교수님을 직접 만나 뵈었다.
건물 내는 깔끔하고, 기하학적인 조명이 가운데에 달려있어서 보는 맛이 있었다. 아무튼 이 광경을 뒤로 하고 맷 교수님 오피스를 들어가니, 굉장한 테토남(..., 외견 말고 마인드가)의 중년 서양 남성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뒤에서 후술하겠지만, 약간 한국 교수의 까라가 있었다. 일을 빠르게, 그리고 내가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얻는 것을 좋아해보였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에둘러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잘(거의) 안한다는 swearing을 너무 잘 하더라.. 연구실 사람들도 그렇고, 교수도 그렇고.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서술하려고 한다.


실험실도 구경하고, 내 자리도 배정은 받았고, 연구실 사람들하고 한번 씩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교수는 나랑 사실 깊은 상의를 하지 않고 내가 앞으로 맡게 될 실험 주제를 알려줬는데(...), 파이썬 코딩을 기반으로 한 액체 샘플 처리 자동화 장치를 돌려서, 실험에 최적화 된 폴리펩타이드나 단백질을 스크리닝하고, 또는 ELISA와 같은 실험 기법을 자동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과정을 내가 습득해서 논문을 쓰는 것을 주 과제로 삼고 있다고 했다. 난 파이썬도 모르고 ELISA도 한 번만 해봤는데, 약간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K. K. 말로는 포닥은 시키는 거 다 해야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맞는 듯 하다.





맷 교수님이 나한테 보여주었던 그 로봇은 공교롭게도 내가 출근한 날 설치 시작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한테 'What a perfect day!'라고 했다. 보스턴의 MIT에서 설치를 위해 날아온 엔지니어 분이 설치를 도맡아서 해주었는데, 굉장히 나이스하셨다. 그리고 실험 장비도 매우 fancy했을 뿐만 아니라, 정밀도도 높았다.





좋은 우연으로, 이 연구실에 이미 계셨던 한 한국인 박사생분인 H. Y.님을 만날 수 있었다. 노터데임대 내 다른 교수를 co-advisor로 해서 공부하고 계셨어서, 맷 교수 연구실에 항상 상주하진 않을 것 같다는 말을 주셨다. 아직 내가 차를 사진 않아서, H. Y.님이 차를 몰고 근처 아시안 마트를 데려다 주셨다. 여기서 김치랑 라면이랑 쌀을 샀다. 난 이런거 안살 줄 알았는데 사람은 역시 앞날을 모른다.
실험실의 인상은 크게는 세 가지를 받았다. 하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자유로웠다. 물론 한국의 연구실 문화가 굉장히 toxic하고, 미국의 여느 연구실은 모두 자유롭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H. Y.님으로 부터 들었던 몇 가지 이야기, 또는 내가 맷 교수와 만나고 나서 '이 교수님 약간 한국교수 까라가 있다'라는 생각을 받았던 것을 고려하면, 그 고정 관념에 비해서도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나이를 좀 들게 되면 swearing을 잘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교수도 학생도 굉장히 자유롭게 sweraing을 하더라. 내가 맷 교수 오피스에서 그를 만났을 때, 위의 장비를 토대로 AI와 자동화 장비를 결합한 연구가 fucking intersting할 것이라고 했을 때 사실 조금 놀랬다. 그리고 실험실에 들어가니, 날 반겨주었던 한 여학생이 'Honestly, Matt is sometimes fucking ridiculous'라고 했었는데, 이게 아무리 교수가 없는 자리에서 말을 한다고 해도 저렇게 말을 하기는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연구실이 조금 특이한 축에 속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내 정신적 지주였던 J. O. 형의 오피스는 굉장히 독립적이고 넓은 공간이었는데, 나는 포항에 있을 때 연구실 자리보다 약간 더 좋지 않은 오픈된 공간을 배정받아서 놀랬다. 물론 내가 뭘 하고 있든 사람들은 별 신경 안쓰는 축에 속하기는 하지만, 땅덩이 넓은 미국에서 내가 이 공간보다는 더 독립적인 공간을 받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싶기는 했다. 그리고 컴퓨터는 안주더라. 줄만 하지 않나 싶긴 했다. 컴퓨터를 여기서 살 날이 올까?

저 공간에 한국에서 받은 몇 가지 편지를 늘어놓고 있으면 1 %정도 두려움 농도가 옅어진다. (사진찍고 닫았습니다. 걱정 No)




아무튼 첫 날에는 딱히 할 게 없어서 인사만 나누고 빠르게 집으로 돌아갔다. 학교 풍경이 굉장히 아름다웠다. 학교 안에 헬스장이 있다는 소식을 어떻게 어떻게 찾아 들었고, 한 번 방문해서 카드를 등록해보았다. 잘 작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가 새로 머물게 될 건물을 속을 좀 들여다 보았다. 작은 헬스장이 있어서, 비오는 날 학교에 있는 헬스장까지 들리기 싫을 때 쓰면 유용할 것 같았다. 물론 하체같이 원반이 좀 필요한 경우에는 여지없이 학교를 가야할 것 같다.



약국도 들렸다. 피부 알러지가 약간 올라와서 의사 상담을 받고 전문의약품을 처방 받았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GoodRx라는 어플을 쓰면 싸게 의사와 버츄얼로 상담하고 약 처방전을 받아, 근처에 가까운 약국이나 CVS라는 지점에서 전문의약품을 수령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피부과를 방문하여, 의사 진단을 받고, 그 처방전을 약국에 제출해서 받는 식이었을 텐데, 미국에서는 이런 병원 의사를 직접 면대면으로 방문한다면 일단 피부 알러지여도 진료비만 20만원은 나온다. GoodRx의 사용법을 익히려고 3가지 글을 참고했다 (1. https://m.blog.naver.com/hbpia1/221435297645/ 2. https://tobethe1.tistory.com/158/ 3. https://m31phy.tistory.com/entry/유학-생활-미국에서-탈모약-구매하기 (P.S. 탈모 없습니다 ㅠㅠ)) 처방전, GoodRx Prescription 구독 비용, 의사 상담 비용, 약 값까지 포함해서 90일 어치 알러지 약이 약 6만원 정도 들었다. 90일 어치를 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1년 있는 미국에서 미리 받아놓고 싶었다.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무튼 약간의 할 일 처리를 하고 나서야, 학교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해보고자 했다. 미국 형님들은 어떻게 운동하고, 얼마나 몸이 큰지 보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미국 형님들 운동은 굉장히 intense하고, 쉬지 않으면서 했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몸이 우락부락했다. 물론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도 많다. 살을 빼러 오는 사람도 많다. 근데 대부분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우락부락 근육이 있는 남자들과, 복근이 너무 선명한 여자들 (저게 어떻게 되지? 하는 느낌. 그리고 보고 싶어서 보는게 아니라, 남자들은 나시나 반팔을 입는데 여자들은 보통 룰루레몬 같은 브라탑을 입으니까..)이 많아서 약간 위축됐다. 근데 뭐 변방 아시안은 아무도 신경 안써서 좋았다.

새로 이사온 집은 걸어서 5분 거리에 트레이더 조(Trader Joe's)가 있다. 한 인친으로부터 Must-have item을 추천받아서 브리오슈 빵을 샀다. 한국에서 먹었던 모든 식빵보다 맛있었다. 진짜 강력 추천한다. 크림치즈도 사서 아침마다 한 조각에 치즈 발라서 먹는다. 미국인이 된 것만 같다 (식빵 먹을 때만.) 저 옆의 베이글은 에브리띵 벗 베이글 이라는 베이글인데, 비추.

데빗 카드도 드디어 수령했다. 이제 핸드폰이나 컴퓨터, 또는 식당에서 이 카드로 Chase계좌에서 돈을 사용할 수 있다. 여태까지는 트래블로그나 우리카드를 사용했었는데.. 트래블로그는 괜찮은 편인데 가끔 아마존 같은 곳에서는 트래블로그 결제를 허용하지 않아서, 우리카드로 사용해서 많은 수수료가 갈려나갔었다. 이젠 좀 괜찮으려나.
그 다음 저번 화에 말했던 SSN을 다시 발급신청하러 갔다. 이제는 해주더라. 다시는 SSA에 가고 싶지는 않다. 약간의 기본적인 불친절함이 깔려 있기도 하고, Medicare를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아서 전반적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있다. 참고로 이 SSN 종이는 지폐 수준의 얇은 종이가 덜렁 봉투 안에 넣어져 오는데, 우편함에 내 이름이 쓰여있지 않으면 묻지마 반송이 된다고 해서, 다음처럼 우편함에 내 이름을 써서 넣어놨다.

빨리와서 세금면제 처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디애나는 소득세가 33%다. 텍사스에 있는 동기는 개인소득세가 없어서 사실상 주 소득세가 0%라더라 (연방 소득세는 모르겠음). 어쨌든 SSN만 나오면 이민국에 신청도 하고, 신용카드도 신청하려고 한다.

다음 날이 되서, 오전에 저 로봇을 내 맥북에 연결하느라 꽤나 애를 먹다가 시간이 다 가서 점심을 먹고자 했다. 여기 애들은 점심을 정말 프라이빗하게 먹고, 따로 점심시간 없이 일하다가 먹다가 일하다가 먹다가, 또는 나갔다가 들어오고 이런다. 난 그것도 모르고 다같이 밥먹나 하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밥 때를 놓쳐서야 내 건물 주변에 있는 카페에서 파는 샐러드를 하나 사서 왔다. 진짜 가격이 너무 비싸서 까무라쳤다. 얼마일 것 같나?
17달러다. 이 이후로는 이 카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2-3일에 한 번씩 트레이더 조에 가서, 4.99달러 짜리 샐러드를 2-3개 씩 미리 사두고 집에 둔 다음 하루에 하나씩 가져가 점심에 먹는다. 이 후에도 여기 식비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밥솥도 사서 밥도 했다. 별의 별 걸 다 한다.


이 날 점심에는 화공과 대학원생 및 포닥 대상으로 아이스크림 데이가 열렸다. 알려준 장소에 가니 Free ice-cream pick up 가판대가 있었다. 하겐다즈와 같은 비싼 아이스크림도 많았는데, 내가 홀린 듯이 집었던 것은 이 망고 멜로나였다. 맛있었다. 한국에서 이걸 팔아야 하지 않나?

일주일이 얼레벌레 가다 보니, 주말에는 내가 기존에 임시로 살았던 거주지를 완벽히 청소하고 나오려고 했고, 근처 체이스 뱅크에 현금을 입금하러 갔다. 가는 길에, 비빔밥 식당이 곧 오픈한다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에 먹고 갈 수 있겠지?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난 몰랐던 미국 내 컨트리 가수 Zach Bryan (https://www.instagram.com/zachlanebryan)이 공연을 하러 왔었어서, 시카고나 미시간으로부터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금요일 밤과 토요일 오전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컨트리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스포티파이에서 찾아서 들어보니 역시 내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가수인 것 같다.



이건 주중 한 저녁에 맥주가 급 땡겨서 바로 건물 옆에 있는 펍에서 주문한 맥주와 치킨인데, 저렇게 해서 팁 포함 40달러를 내고 다시 안갔다. 그리고 맥주가 차갑지가 않아서 동양인 혐오인가 싶었다. 강제 절주 중이다.


약간 우울에 빠질 때마다 어떻게 알아주고는 현실자각타임 한번씩 만들어 주는 S. K. 누나 덕에 외로움이라던가 자학적 워커홀릭에 빠지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튼 이번 주말에는 어떻게든 뭘 해서라도 밖에서 놀고 싶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서 칠링하면서 지내고 있다. 무료한 곳이긴 하지만, 사람 사는 데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을 이해하고 있다. 아무쪼록 외로운 곳이지만, 여러분들은 포항 및 집에서 친구들이랑 잘 지내고 계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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